서른 몇 해를 같은 자리에서 보내다 보니 정년이 된다는 게 실감이 안 났습니다. 마지막 날까지도 이게 진짜일까 싶었는데, 사표를 내던 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더군요. 의무감과 책임감으로 붙잡고 있던 것들이 한순간에 사라지니까 말입니다.

처음 몇 달은 막막했습니다. 아침에 눈을 떠도 갈 곳이 없고, 매일 똑같은 루틴이던 생활이 깨지니 정체성까지 흔들렸어요. 그런데 시간이 지나면서 신기한 일들이 생겼습니다. 새벽에 잠 안 오면 산책을 나가고, 궁금했던 책을 펼쳐 들고, 아내와 차를 마시며 한숨도 쉬어본 적 없는 얘기들을 나누게 됐어요.

지금 생각해보니 직장이라는 틀에서 벗어나는 게 끝이 아니라 다시 시작하는 거였더군요. 조금 더 천천히, 조금 더 내 페이스대로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.